[하] 디즈니는 왜 OpenAI를 선택하고, 구글을 배제했나...10억 달러 AI 동맹이 재편하는 할리우드 권력 지도
소라(Sora)라는 선택의 중요성
디즈니가 오픈AI와의 협력에서 특히 영상 생성 모델 소라를 중심에 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디즈니가 생성형 AI를 단순한 내부 업무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 경험 자체를 재구성하는 기술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텍스트 기반 생성형 AI는 이미 많은 기업에서 문서 작성, 기획 보조, 고객 응대 등 효율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영상 생성 AI는 콘텐츠 산업의 핵심 영역을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디즈니의 경쟁력은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자산에 있다. 소라는 이 자산을 활용해 짧은 영상, 팬 제작 콘텐츠, 실험적 형식의 스토리를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도구다. 이는 기존의 제작 파이프라인과는 전혀 다른 속도와 규모를 가능하게 한다. 디즈니가 소라를 통해 허용한 것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향후 콘텐츠 소비 방식 변화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다.
하지만 디즈니는 소라를 무제한 개방하지 않았다. 캐릭터 사용 범위, 생성물 길이, 활용 목적 등은 모두 계약을 통해 제한됐다. 이는 초기 소라 공개 당시 등장했던 문제들을 의식한 조치로 해석된다. 소라 초기에는 유명 캐릭터가 극단적이거나 범죄적인 상황에 등장하는 영상들이 확산되며 논란을 낳은 바 있다. 디즈니는 이러한 리스크를 방치하기보다, 차라리 통제 가능한 환경 안에서 활용을 허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전략은 디즈니+와의 연계에서도 드러난다. 디즈니는 소라로 생성된 영상 중 일부를 선별해 디즈니+에 공개할 계획이다. 이는 생성형 AI 콘텐츠를 외부 소셜 플랫폼의 변두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사 서비스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미다. 동시에 디즈니는 AI 생성물이 기존 장편 콘텐츠를 대체하기보다는, 팬 참여형 콘텐츠나 부가 경험으로 기능하도록 선을 그었다.
소라 선택의 또 다른 의미는 기술 방향성에 있다. 텍스트 AI는 이미 범용화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영상 생성 AI는 아직 규범과 질서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다. 디즈니는 이 초기 단계에서 직접 규칙 설정에 참여함으로써, 향후 산업 표준 형성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술을 따라가는 전략이 아니라, 기술이 작동하는 방식에 개입하는 전략에 가깝다.
결국 디즈니가 소라를 선택한 것은, 생성형 AI가 콘텐츠 산업에 미칠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역이 영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디즈니는 이 영역을 외부에 방치하기보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관리 가능한 실험장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선택은 향후 다른 콘텐츠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중요한 참고 사례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노조 반발은 변수이자 안전장치
미국작가조합(WGA)과 배우노조(SAG-AFTRA)의 반발은 이번 거래의 잠재적 리스크로 꼽힌다. 이들은 AI 기업이 기존 창작물들을 학습해 성장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계약이 저작권 침해를 사실상 정당화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다만 디즈니 입장에서 노조 반발이 완전히 통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디즈니는 기존 노사 합의와 협의 구조를 근거로 AI 활용 범위를 단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WGA(미국작가조합)는 대본 개발·집필은 AI를 보조로 제한하고 작가의 동의·정책 준수를 전제로 운영하도록 되어 있다. 배우노조(SAG-AFTRA)는 리스크가 큰 실사 배우의 얼굴·목소리는 제외하거나 별도 동의·조건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디즈니가 오픈AI와의 계약에서 “실사 배우의 얼굴·음성은 제외” 같은 조건을 내세운 건, 바로 이 노조 프레임과 충돌을 줄이기 위한 방어선으로 볼 수 있다
이번 계약은 완결된 해답이 아니라, 지속적인 협의와 수정이 가능한 실험 모델에 가깝다. 디즈니가 노조를 배제하지 않고 협상 테이블에 남겨둔 점은, 일부 빅테크 기업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로 평가된다.
ㅇ AI는 작가의 ‘문학적 작업(literary material)’을 쓰거나 다시 쓰는 주체가 될 수 없고, AI가 만든 결과물은 협약상 ‘원작(source material)’로 취급되지 않아 크레딧·권리(분리권 등)를 흔드는 방식으로 쓰기 어렵다
ㅇ 작가가 원하면 AI를 활용할 수는 있지만, 회사(스튜디오)가 작가에게 AI 사용을 강제할 수 없다
SAG-AFTRA(배우노조)
ㅇ 디지털 레플리카는 ‘배우의 이름·목소리·외형·연기’가 대체될 수 있는 영역이라, 사용 목적·범위·보상·통지(투명성) 같은 조건을 계약 프레임 안에서 다루게 된다
OpenAI가 얻은 것은 IP보다 정당성이다
오픈AI에게 디즈니는 단순한 콘텐츠 제공 파트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디즈니는 할리우드 IP 질서를 상징하는 기업으로, 그 참여 자체가 오픈AI에게는 강력한 정당성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디즈니와의 계약은 오픈AI에게 합법적 라이선스 모델의 사례를 제공하고, 향후 규제 논쟁에서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
최근 소라 이용자 감소와 인프라 비용 증가로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디즈니와의 동맹은 오픈AI에게 신뢰와 자본을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적 카드로 평가된다.
글로벌 스탠다드가 될 디즈니의 선택
단기적으로 디즈니 모델이 업계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기는 어렵다. 디즈니가 갖고 있는 조건(글로벌 IP를 보유하면서, 플랫폼 종속을 거부할 수 있으며, 노조와의 협상력)을 동시에 갖춘 기업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계약은 글로벌 모델의 기준점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향후 미디어 기업과 AI 기업 간 협상은 이 사례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한국 콘텐츠 산업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국내 OTT와 제작사는 AI 기업과 어떤 조건으로 협력할 것인지, 라이선스 없이 학습되는 AI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해졌다. 정책적 규제보다 계약과 동맹이 더 빠른 방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즈니의 선택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디즈니는 AI 경쟁에서 가장 빠른, 선도적인 기술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통제 가능한 동맹을 선택했다. 이번 디즈니와 오픈AI 거래의 핵심은 모델 성능이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있다.
AI 시대 콘텐츠 기업의 생존 공식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직접 기술을 만들 수 없다면, 누구와 손을 잡을지부터 설계해야 한다.